미적가치와 삶/영미분석

현대 미학에서 예술 정의론의 전개과정

DDTKk 2012. 3. 3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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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철학의 기본 질문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함.
*. 예술의 정의를 묻는 것은 예술의 본질을 찾는 데에서 가능한 것으로 간주됨.
그러나 '본질'과 '정의'는 같은 것일까?
-. 본질: 어떤 사물이나 개념이 성립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핵심적 특성
-. 정의: 어떤 것(정의항)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
정의와 본질은 서로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예) 인간을 깃털없는 두발 짐승으로 정의할 수 있지만, 깃털 없이 두발로 걷는다는 속성을 인간의 본질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
*. 예술 이해를 위해 예술의 정의에서부터 출발할 필요는 없다.
예술을 정의하는 것과, 일상생활에서 예술이 무엇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서로 구별됨.
정의가 없어도 예술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까지는 잘 구별할 수 있다.
*. 예술에 대한 정의 없이는 예술철학이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주장은, 과학철학의 논의들은 과학에 대한 정의가 없는 한 성립될 수 없다는 것만큼이나 과장된 것.
그렇다고 예술에 대한 정의는 아무 것이라도 좋다거나, 이것을 예술의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음.

[전통적 정의들의 실패]

*.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답변들
: 최초의 모방론(플라톤), 직관(크로체), 표현(크로체-콜링우드), 감정의 전달(톨스토이), 감정의 형식(랭거), 의미있는 형식(벨)
: 이들은 실패한 예술 정의. 예술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을 제공해 주지 않음.
예) '감정의 표현'이 예술만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자 예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에셔의 그림이나 몬드리안의 추상화, 푸가는 이와는 무관해 보임.
*. 예술에 대한 전통적 정의들은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가치중립적으로 설명해 주지 못함.
차라리 이들은 예술의 규범적 측면에서의 주장으로 취급되어야 함.

[웨이츠의 반-본질주의와 예술 정의 불가론]

*. 윌리엄 웨이츠의 주장
"전통 미학은 서로 다른 예술작품에 공통된 본질이 공유되고 있다는 잘못된 가정 위에서 출발한다"
→ 공통된 하나의 본질이 없는 예술은 필요충분조건으로 정의할 수 없다.
*. 다양한 예술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가족유사성 뿐.
예술작품의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 간주되어 온 인공성마저도 모든 예술작품에 공통적인 성질은 아님.
예술이라는 개념은 게임이라는 개념과 유사하게 열려 있는 개념.
(주어진 대상이 기존 개념 구성원 일부와 닮기만 하면, 그 개념의 새로운 대상이 될 수 있다)
*. 웨이츠는 예술이 정의될 수 없다는 소극적 주장을 넘어서, 예술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본질이 없는 열린 개념이라는 적극적 입장을 표명.
*. 예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한계를 거부하는 것이어야 함.
지금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예술도 미래의 예술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

[웨이츠 이후의 예술 정의론]

*. 웨이츠 이후에 등장하는 예술 정의론들은 본질론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웨이츠의 논증을 반성해 보는 과정에서 도출된 몇 가지의 교훈을 지키면서 수행.

조지 디키

: 평가적 속성과 분류적 속성을 구분.
-. 평가적 속성: 좋은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평가적인 가치로서의 속성
-. 분류적 속성: 그러한 가치 평가로부터 중립적인 예술작품과 그렇지 않은 에술작품을 구분하는 분류적, 서술적 속성. → 최악의 영화도 분류적으로는 영화임.
*. 과거에 제시된 예술의 정의들은 너무 단순함. 예술에 본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복잡한 정의가 필요.

만델바움

: 전시적 성질과 비전시적 성질을 구분.
*. 예술에서 이제까지 공통점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 웨이츠의 주장은 사실이나, 이는 전시적 성질에서만 국한해서 본 것.
*. 예술의 비전시적/관계적 성질들을 고려한다면, 즉 어떤 것이 예술이라 함은 그것이 그 외의 다른 것들과 맺고 있거나 맺을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얻게 되는 지위라고 생각하면 새로운 예술 정의의 가능성이 열리게 됨.

[데이비스의 절차적/기능적/역사적 정의]

조지 디키(절차적 정의)

*. "예술 제도론": 어떤 작품이 예술이기 위해서는,
1) 예술이란 인공품으로서,
2) 예술계라 부를 수 있는 사회 제도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 인공품의 어느 국면에다가 감상을 위한 후보의 자격을 부여해 놓은 것.
*. 디키는 자신의 정의가 예술의 내재적 성질이 아니라 예술을 둘러싼 제도 및 관습과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함(평가적 측면보다 분류적 측면에 초점을 맞춤).
*. 예술계: 예술을 둘러싼 관행과 관습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과 예술적 유산 및 예술가의 의도, 비평가의 평론 등이 얽혀서 짜 놓은 역사적 사회적 배경(단토).
 
ant1. 예술계의 구성원은 누구인가? (디키는 예술계의 구성원을 느슨하게 설정함.
ant2. 순환적 오류.

비어즐리(기능적 정의)

*. 초기에 비어즐리는 정의의 문제를 우회하고자 예술작품 대신 '미적 대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음,
*. 그러나 후기에는 관찰 가능한 성질 대신 예술의 기능에 입각한 성질이나 능력에 주목하면서 예술을 정의하려 함.
예술작품은 '필연적으로 예술에만 고유한 어떤 기능을 달성하려' 하는 것.
*.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예술.
내용 면에서, 대상이 갖고 있는 미적 속성을 경험하는 것.
효과 면에서, 그 경험이 우리를 특별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고양시키는 그런 경험.
*. ANT. '미적 정의'라 명명된 이 기능적 정의의 문제점.
1) 미적 정의라는 것의 존재와 그 가치를 정당화하기 어렵다. 특정 시기의 예술에서는 명백히 예술의 기능이었으나, 미적 기능 이외의 사회적·제의적·교육적 기능을 하도록 기대되는 것들을 모두 예술에서 제외할 근거가 있는가?
2) 의도적으로 무엇이 예술에서 가치있는 것인가를 상정하여 예술을 정의하고 있으므로 실패한 예술(미적 기능을 의도하였으나 전혀 달성하지 못한 작품)이나 나쁜 예술의 경우 문제가 발생함.
→ 과거의 예술이 주로 미적 기능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한 도전과 거부를 주제로 한 작품이 출현했을 경우, 비어즐리는 이들을 모두 비예술로 취급해야 할지도 모름.

절차적 정의를 적용하든 기능적 정의를 적용하든 간에, 대부분의 경우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은 비슷하게 갈려질 것임(양자를 철저히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역사적 정의

: 레빈슨, 캐롤 등은 현재 우리가 가진 예술은 과거 우리가 가졌던 예술과의 관련을 통해서 정의될 수밖에 없다고 말함.
*. 어떤 것이 예술이라면, 그것은 최소한 같은 예술계 안에서, 그것에 앞서서 예술로 간주되어 왔던 것과 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레빈슨의 경우, 과거와 현재의 예술 간의 적절한 관계란 과거의 작품들이 예술작품으로 취급되어 왔던 방식들 중 어느 하나로 현재 이 작품도 취급되려는 의도를 뜻함.
ant1. 과거의 예술로 현대의 예술을 정의한다는 것은 순환적.
(현재의 예술 정의 속에 과거의 예술이 포함됨. 결국 최초의 예술의 존재를 요청할 수밖에 없음.)
ant2. 데이비슨은 역사적 접근이 상대주의와 관련된 문제를 유발한다고 지적함.
과거의 예술과 현대의 예술이 관계하는 방식이 수없이 많아지게 됨.
문화마다 다양한 '예술 만들기'의 기준이 존재하게 되는데 그것들 중 어떤 특정한 것이 예술 만들기의 기준으로 규정하기 어려움.

참고자료: 이해완, <예술의 정의>, 『미학대계2』,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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