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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개신교가 조선에 본격적으로 전래, 수용됨.
주로 상인들이 개신교를 받아들임. 이들 상인들은 비교적 생활수준이 높았음.
그리고 자작농, 소작농 등 경제력 있는 농민층도 개신교 신자가 되었음.
청교도적인 윤리관이 이들에게 어필하였음.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이 박영효를 따라 일본에 가서 성서를 번역함.
이수정은 1884년 미국 잡지에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기사를 썼음.
(1886년 개화파를 견제했던 집권세력에 의해 처형당함)
그래도 개신교는 천주교에 비해서 순탄하게 들어왔음.
천주교는 전통적 사상(주자학)과 대립하면서 근대화의 길을 닦아 왔다면,
개신교는 문호 개방 이후에 개화사상을 이끌어 왔음.
조선에 파견되었던 개신교 선교사들은 대체로 뉴잉글랜드 출신.
이들은 개화 운동, 교육 및 의료사업(세브란스병원)을 하였음.
1894~1895년 갑오개혁으로 교회들의 세력이 대폭 확장됨.
↔ 벽위사상: 기독교 사상의 확산에 대항함
벽위사상가들은 숭정학(崇正學: 유학을 정히 해야 함)을 주장함.
천주교 뿐만 아니라 개신교도 배척하였음.
이들은 수구적인 사고관을 가졌지만 개화기 이후 힘을 떨치지 못했음.
문호개방 이후, 개화를 주장하는 측과 수구를 주장하는 측이 서로 갈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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