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따라 다양한 실학이 있지만 17~18세기의 실학에 한정되어 논의됨.
전공에 따라 실학에 대한 입장이 다양함.
조선 전기의 권근 曰 "경전을 깊이 공부해서 실학을 하는 선비를 얻어야 합니다"
세종 시대 황희 曰 "허명에만 힘쓰고 실학에 힘쓰지 않습니다"
세조 曰 "실학에 힘써야 한다"
율곡 이이 曰 "三代(중국 고대 하, 은, 주) 때가 살기좋은 시대이며, 삼대를 목표로 삼아 실학에 힘써야 한다"
→ 어느 시대든지 '실학'으로 불릴만할 학문이 있다.
실학의 대표적 학파인 성호학파는 개방적 학문 전통이 특징.
그런데 그 때문에 학파 구성원 서로간에 논쟁이 잦았음.
(서학에 대한 입장의 차이: 한쪽에서는 천주교를 믿다가 사형을 당하고 다른 한쪽은 서학을 배척함)
성호학파의 온건 계열은 20세기까지 이어짐(→벽위세력).
후기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실학이라는 물이 빠짐.
서세동점 상황에서의 한계. 성호가 주장한 개혁안들은 무효가 되어 버렸음.
19세기에 걸맞는 실학이 필요해짐.
"한 시대를 풍미한 실학이라 하더라도 그 시대가 지나가고 역사적 상황이 바뀜에 따라 실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다른 모습의 실학으로 태어나야 한다. 상황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실학이 언제든지 새롭게 등장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적 상황에 따른 시대적 소산으로서의 실학
17~18세기에 적합한 실학과 19세기 말에 필요한 실학이 다름.
19세기 말의 개화사상은 유학을 벗어나 있음(17~18세기 실학은 유학의 범주 안에 있었지만, 개화사상은 유학을 넘어섰음). 하지만 개화사상가들이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아님.
박규수와 오경석 같은 개화파 인물들은(이들은 개화사상가도 아니고 실학자도 아니지만) 실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부국강병과 온건 개혁을 주장함. 급진개화파들은 큰 호응을 받지 못했음.
그렇다고 개화사상이 시대적 상황에 잘 대응하였는가? 아니다.
"실학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새로운 학풍으로 등장한다. 실학자들은 개혁을 주장하다가 현실문제를 직접 해결하고자 하고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다가 어느 시기에는 또다른 상황을 맞이하여 한계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실학을 창출해야 실학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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