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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사상] 조선 후기 기독교 사상(천주교)의 전래와 연구

DDTKk 2018. 10. 15.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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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에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됨.

실학자들이 호기심으로 서학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며, 종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음.

(서구 사상에 대한 호기심, 유학과의 비교 등)

 

기독교 사상의 전래

 

-. 마테오 리치(이마두)의 『천주실의』가 1604년~1605년경에 조선에 유입됨.

기독교 교리를 문답식으로 정리해 둔 책)

 

-. 한역 서적을 통해서 조선에 유입되었음.

서양의 지식을 한국인이 알 수 있는 수단.

 

-. 서양과 교류가 잦은 청나라에는 성당이 건립되었음. 조선의 사신이 천주교 성당을 방문함.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천주교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음.

 

17세기 초반에는 "천주교라는 것이 있더라" 정도와 천주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 정도만 있었음.

(조선사회에서 천주교가 용납되지 않았음)

18세기 후반에 행동이자 신앙으로서의 천주교가 전파되었음.

 

기독교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17~18세기의 기독교는 천주교.

(개신교는 19세기 후반에나 등장함)

 

천주교의 평등 사상이 공감을 받게 되었음.

신분제도가 차츰 붕괴되어 가는 과정에서 천주교의 역할이 커짐.

 

18세기 성호학파 학자들이 천주교에 대해 관심을 보였음.

(성호학파 학자들은 신유박해때 많이 희생되었음)

 

초기에 천주교 연구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양반들이었지만, 점차 민중 사회로 퍼져듦.

 

성호 이익의 학풍은 "이단학이라도 다 나쁜 것이 아니다".

천주학도 쓸만한 것이 있다(한편으로는 천주교를 비판하기도 했음)

비판의 예) 천당/지옥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영혼불멸설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취했음.

 

1770년.

성호학파 학자들이 천주교 연구 시작.

1780년대 중반에는 일부 학자들이 천주교의 교리에 심취하여 종교적인 문으로 들어섬.

 

1785년.

명례방 사건(명례방은 오늘날 명동성당 지역)이 터졌음. 관헌들이 일러 바침.

1780년대 들어 전면적인 천주교 배척 사태가 발생하였음.

 

천주교 박해의 가장 큰 원인은 유교사상과 배척되기 때문.

 

천주교의 평등사상의 의의:

당대인들의 근대적 안목을 열어주고, 신분제를 타파함, 전통사회 붕괴 가속화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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